머릿속에 세계지도를 넣어라
안 병 민열린비즈랩 대표『마케팅 리스타트』,『경영일탈–정답은 많다』저자
“저의 에너지, 경험, 눈길, 지금 이 시간만큼은 오롯이 여러분께 쏟아붓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그래 주세요.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은 머리, 가슴, 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긴급구호팀 팀장이자 ‘바람의 딸’로 널리 알려진 한비야 세계시민학교 교장의 강연 첫 마디다. 시작부터 활활 타오를 조짐이다. 근 10년간 전 세계 구제구호의 현장에서 팀장으로 활동하고,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을 거쳐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을 맡은 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머릿속에 세계지도를 넣어라
한비야 교장은 세계지도로 ‘머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계지도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다. 그 많은 나라 중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나라도 있지만 우리를 필요로 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는 그중 얼마나 많은 나라를 알고 있을까?
“아버지가 중앙 일간지 정치부 기자였습니다. 필화 사건도 겪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셨지만, 그래서 절대적인 시간도 부족했지만, 그래도 저는 우리 형제들과 많이 놀아주셨던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뜨겁게 우리랑 놀아주셨기 때문이지요.” 한 교장의 아버지가 아이들과 같이 갖고 놀았던 장난감은 바로 세계지도. 그는 지도를 펴놓고 아이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또래의 아이들이 내가 사는 동네, 기껏해야 한국 땅이 세상의 끝인 줄 알 때 이미 한 교장의 마음속에는 중동, 아프리카, 남미, 유럽이 아로새겨졌다. 그러면서 ‘세계일주’는 자연스레 한 교장의 꿈이 됐다. 아버지는 그 꿈을 허황하다 나무라지 않고 너는 할 수 있을 거라 격려해 주었다.
“학창 시절 세계 일주가 꿈이라고 했더니 친구들이 다 놀라더군요. 저는 그게 더 놀라웠습니다. 두 다리가 있고 지도가 있으니 내 발로 걸어서 세계를 돌아보겠다는데 왜 이리 놀라는 거지? 그랬습니다. 친구들과 저와의 차이는 단 하나. ‘머릿속에 세계지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지요. 제 머릿속에 들어있던 세계지도 한 장이 실제 저의 세계 일주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마당까지 딸린 커다란 집에서 왜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거기 콕 틀어박혀 사나, 마당까지 나와서 시원한 공기도 마시며 힘차게 뛰어놀자’라는 게 한 교장의 지론이다. 그러고 보니 한반도에 묶여 있을 이유가 없다. 아울러 ‘우리’의 범위도 좀 더 넓게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국인이자 아시아인이자 세계인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도 ‘우리’에 들어가고 아시아인도 ‘우리’에 들어가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우리’에 들어간다. 머릿속의 세계지도가 하드웨어라면 그걸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세계시민의식’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를 필요로 하는 나라를 돕겠다는 생각이 싹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은 정글의 법칙으로 돌아간다는 걸 저도 압니다. 승자독식, 적자생존, 1등만 기억하는 세상. 하지만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또 다른 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과 은혜의 법칙’입니다. 승자가 패자를 돕고 그 패자가 나중에 승자가 되었을 때 또 다른 패자를 돕는 것. 그게 바로 ‘사랑과 은혜의 법칙’입니다.”
자본주의가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물질 만능주의라는 폐해로 인해 우리의 삶은 정신적으로 황폐해졌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생각,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달린 것이라는 한 교장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제로 구호개발 분야에서 대한민국은 희망의 상징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88올림픽이 끝난 1990년까지도 우리나라는 짐바브웨, 남수단, 아이티 등의 나라와 함께 세계의 원조를 받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그런 나라들을 도와주는 나라가 되었지요. 우리나라가 바로 ‘사랑과 은혜의 법칙’의 실제 사례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데 필요한 사랑과 관심의 양은 의외로 많지 않다. 자그마한 사랑과 관심이 사람을 살린다. 남수단 톤즈의 아이들은 똥물을 마신다. 그 아이들이라고 물이 더럽다는 걸 왜 모르랴. 그들이라고 물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가 어찌 역겹지 않으랴. 하지만 그들은 마신다. 살기 위해서다. 이 아이들이 마시는 물을 정수하는 데 드는 돈은 불과 천 원이다. 배고픔으로 3초에 한 명 씩 죽어가는 이 가슴 아픈 현실을 바꾸는 데 바로 우리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한 교장은 강조한다. ‘우리’와 ‘사랑’의 범위를 바로 내 눈앞이 아니라 세계로 넓히자고 그는 역설한다. 그러기 위한 전제는 ‘머릿속 세계지도’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사랑과 열정의 불꽃을 태워라
“저는 99도의 미지근한 삶이 아니라 100도로 펄펄 끓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지 마세요. 90분 축구 경기에 우리네 인생을 대입해 본다면 40대의 나이는 아직 전반전입니다. 중요한 건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 ‘멋진 경기’입니다. 이제 제가 드릴 이야기는 ‘가슴’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을 향해 열정의 불화살을 쏠 텐데요. 부디 기꺼이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차가운 ‘머리 이야기’에서 뜨거운 ‘가슴 이야기’로 화제를 바꾼 한 교장의 목소리가 사뭇 비장해졌다. 불은 나눈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늘어난다. 자신의 불을 나눠줄 테니 그 불을 댕겨가라는 한 교장. 사랑과 열정의 불바다를 함께 만들자는 한 교장의 강의는 뜨겁게 이어졌다.
“세계 일주 여행을 하면서 천 원 한 장에 목숨이 오가는 현장을 숱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다 마음먹었지요. 저도 구호 현장에서 일하겠다고요. 그러던 차에 월드비전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긴급구호팀장으로서의 첫출발이었지요.” 한 교장에게 주어진 첫 현장은 소말리아와 케냐 접점에 있는 어느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는 케냐 출신의 유명한 안과의사가 있는데 멋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한 교장도 나름 부푼 가슴을 안고 그를 만났는데, 첫인상은 그야말로 ‘왕 실망’이었단다. 그런데, ‘누가 이 사람을 멋있다고 한 거야?’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고름이 뚝뚝 묻어나는 환자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멋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단다.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뒤에 비치는 듯한 그의 모습이 그녀에겐 엄청난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의 말이었다. 편하게 살 수도 있을 텐데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냐는 한 교장의 질문에 그의 대답은 명확하고도 단호했다.
“케냐에 있었더라면 편안하게 잘 살았겠지만 내 재능과 기술을 돈 버는 데에만 쓰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한 교장의 가슴에 불화살이 되어 그대로 꽂혔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한 교장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의 씨앗인 셈이다.
자신을 돌아보자.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있나? 혹 ‘죽지 못해’ 또는 ‘어쩌다 보니’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주어진 일에 오늘도 열심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안다. 아직 끓지 않는 99도와 팔팔 끓는 100도의 차이를. 그리고 자신의 열정 온도가 몇 도인지를. 내 가슴은 언제 마지막으로 뛰었던가? 관성적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계적인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던 차에 ‘바람의 딸’이 쏜 불화살에 내 맘 속 불길도 되살아난다.
“다들 바쁘게 사시겠지만 저도 현장에 가면 정말 바쁩니다. 살인적인 일정이지요. 저는 코피가 잘 안 나는데, 어떤 때는 코피가 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제게도 좀 쉬어가면서 일하라고 할 테니까요.(웃음) 어떨 때는 몇 날 며칠을 못 자기도 합니다. 그럴 땐 눈의 실핏줄이 터지는데, 그러다 보면 눈에서 끈적한 게 흘러나오지요. 깜짝 놀라 손으로 닦아보면 피입니다. 말 그대로 피눈물인 거죠. 그래도 그럴 때는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저 자신도 제가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은데,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는 상태거든요. 그런데 그런 피눈물이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 되는 거죠. (웃음)” 그녀가 쏘는 사랑과 열정의 불화살에 내 가슴도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케냐에 있었더라면 편안하게 잘 살았겠지만 내 재능과 기술을 돈 버는 데에만 쓰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한 교장의 가슴에 불화살이 되어 그대로 꽂혔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한 교장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의 씨앗인 셈이다.
다른 이의 눈물과 상처를 닦아주는 손
머릿속에는 세계지도를 담아 ‘사랑과 은혜의 법칙’을 되뇌며, 가슴에는 사랑과 열정의 불덩어리를 껴안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손 이야기.
“구호 현장을 다니면서 저는 다짐했습니다. 제 두 손 중 하나는 저의 생존을 위해 사용하고 남은 한 손은 ‘사랑과 은혜의 법칙’을 실천하는 데 쓰기로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돈 제 발 사이즈가 225입니다. 조그만 여학생 아이의 발 사이즈지요. 어른 운동화는 맞는 게 잘 없어 저는 아직도 미키마우스, 신데렐라가 그려진 아이들 운동화를 신고 세계를 누비고 다닙니다. 보시다시피 자그마한 체구의 이런 아줌마도 다 하는데 여러분이 못 할 게 뭐가 있나요? 여러분의 나머지 한 손도 오늘 이 시간부터 남을 위해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한 교장의 강연은 머리, 가슴, 그리고 손으로 이어졌다. 속사포 기관총 쏘듯 쏟아지는 한 교장의 강의에서 사랑과 정열의 불꽃을 보았다. 40대 나이를 핏덩어리라 지칭하는 유쾌한 모습에서 거침없는 도전과 후회 없는 삶을 보았다. 머리, 가슴, 손으로 이어지는 강연에서 행동하는 이론가의 모습을 보았다. 세계시민학교 교장이란 직함을 갖고 있지만 천생 ‘한 팀장’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세계 구호 현장의 한비야 팀장 말이다.
오늘 그가 쏜 불화살에 나도 결국 맞고야 말았다. 잦아들어가던 내 가슴의 불씨가 불화살을 맞고 다시 타오른다. ‘바람의 딸’로부터 시원한 산들바람을 기대했던 건 애당초 오산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사랑과 열정의 불화살을 쏘고 다니는 사랑과 열정의 디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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